귀한 글 나눕니다.
2006년 겨울, 두 아이의 엄마인 마흔한 살 리디아 앙기유(Lydia Angyiou)는 북극곰과 싸우고도 살아남았다. 앙기유와 어린 두 아들이 동네 커뮤니티 센터 옆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아이스하키를 하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앙기유 앞에 나타난 건 무려 700파운드는 되어 보이는 북극곰이었다. 곰은 그녀와 일곱 살 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야수와 아이 사이로 뛰어들면서 소년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총을 든 한 남자가 올 때까지 그녀는 곰을 발로 차고 때리며 싸웠다.
우리는 종종 아드레날린의 힘을 통해 다른 세상에서나 만날 거 같은 초능력을 행사하는, 비범한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 의지력에 숨은 잠재적인 능력은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게 분명하다.
인간의 의지력이 그토록 강력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고작 몇 파운드를 빼기 위해 그렇게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걸까? 소셜 미디어에서 눈을 떼거나 아이들에게 소리치지 않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의지력과 우리 몸에서 나오는 부신 호르몬이 북극곰과 싸우거나 긴급 상황에서 무거운 차를 들어 올릴 만큼 엄청난데도, 우리는 왜 야식을 억제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의 투쟁 또는 도피 대응 능력은 극한 상황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은 평범함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무한한 유혹에 대응할 힘은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아드레날린 이상이 필요하다. 꾸준한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자제력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 나를 속이는 마음의 간교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제력이라는 미덕을 기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삶, 긴급하지 않은 삶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제력의 필요를 인정하라
성령의 열매 목록(갈 5:22-23)에서 바울이 절제를 제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성령이 연료가 되는 자기 통제의 대척점에 바울이 놓은 것은 죄된 욕망(갈 5:16)과 육체의 행위(갈 5:19)이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갈 5:19-21). 이러한 악덕이 드러내는 것은 전혀 통제되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 자제력은 한계를 정하고 심지어 숨 막히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주의라는 우상 숭배와 자기만족을 종교 수준으로 떠받드는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 자제력은 기껏해야 구식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억압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삶은 자유가 없는 삶이다.
두 가지 유형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관한 연구와 실험이 있다. 하나는 경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경계가 없다. 거의 모든 경우에 경계가 없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공포에 떨지만, 경계가 있는 놀이터는 오히려 움직임의 자유, 개인의 창의성, 그리고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적 화합을 끌어낸다. 자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경계의 설정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속이며 영혼을 마비시키는 사탄의 힘과 무모한 방종의 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놀라운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 자제이다.
죄에 젖은 마음속 고르지 못한 지형을 조심하라
“만물보다 거짓되고(deceitful)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는 예레미야의 말은 인기가 없었다. 오늘날에는 인기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를 공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여전히 사실이다. 죄인인 인간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겸손과 자각 없이는 자제 자체가 불가능하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최근 몇 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을 겸손하게 생각하도록 장려하는 문화에서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도록 장려하는 문화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세상은 이제 개인의 욕망을 제어하는 모든 도덕적 제약을 제거하고 자제에 관한 논의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건 위험하다. 마음을 “거짓되다(deceitful)라고 표현했을 때, 예레미야는 고르지 않은 지형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했다. 마음은 일관성과 꾸준함이 부족하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며 바위가 많고 불안정하며 장벽은 약하기 이를 데 없다.
잠시 당신 속에 숨은 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가혹한 요구라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막 7:21-23).
죄로 가득한 마음의 상태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자제력을 지속하여 행사하는 데 필요한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베드로전서 5:8-9을 보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급하지 않은 삶을 받아들이라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게 빠르게 움직인다. 편의성과 접근성이라는 디지털 유혹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압도했고, 알고리즘은 우리를 더 빨리 움직이도록 바꾸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위험한 속도에 중독되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기만적인 본성과 결합했다. 이제 게임에서 포르노, 소셜 미디어, 그리고 이메일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중독은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되었다.
“중독”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딕투스(addictus)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는 법원의 판결을 통해 노예가 된 사람, 따라서 다른 사람의 법적 재산이 된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독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예이다. 실로 놀라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디지털 기계에 매여있다. 그들은 디지털의 폭정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 잠언 25:28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진 성읍 같다”고 한다. 디지털 세계는 오늘날 우리를 한없이 취약하게 만들었고 우리의 벽은 오래전에 허물어졌다. 우리는 과연 중독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팀 켈러는 트위터에 “자제력이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님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디지털이 초래하는 긴박함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더불어서 자제력을 더 잘 발휘하고 유지하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경계를 정하고 사는 것이다. 내 주변의 디지털에도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하루 중 특정 시간에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밤에는 휴대전화를 아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다. 특히 중독성이 강한 앱은 삭제한다. 이런 결단이야말로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며 우리 삶에서 자제력을 배양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할 때, 느리지만 확실한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에 급박함 없이,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또 평화롭게 다가가는 진짜 자유를 말이다.
제가 너무나도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부분에 대한 글이네요..ㅠㅠ
너무너무 통감하고 동의해요..
자기가 옳은대로 행하는것이 진짜 자유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그 놀라운 자유가 선물하는것이 “자제”라는 것이
너무 와닿습니다.
저는 꽤 절제를 잘하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습니다.
절제, 통제되지 않는 삶의 모습,
그리고 나를 속이는 마음의 간교함.. 저에게 분명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은 왜 이렇게 간사하고
죄에 대하여도 왜 이렇게 스스로 합리화 할까요..?
게다가 매번 죄에 걸려 넘어져서 허덕이는 저를 발견하면
정말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진 성읍과 같다” -잠25:28
너무 찔리는 말씀입니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인 “자제력”
디지털문화로 완전히 허물어진 나의 성벽재건(자제력)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겠어요…
성령님께 도우심을 기도하고,
자제력을 더 잘 발휘하도록 유지하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적인 부분을 더 생각해봐야겠네요..
참으로 귀한 경건의 노력을 응원합니다. 지치지 마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