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의 역사 이야기 (4)
종교의 탄압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미국이라는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 의해 미국의 교회는 시작되었고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단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든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까지 감수해 가며 무사히 미국으로 건너온 그들에게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기쁨의 충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뒤, 구원의 하나님을 모두가 찬양했던 것처럼, 아마도 그것 이상의 감사 찬양을 드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감사의 신앙이 있었기에, 지극히 세속적인 풍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들어온 또 다른 이들의 문화와, 원주민들의 배타적인 민족적 고집에 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감격스러운 감사의 확실한 믿음은 그 어떤 강한 세속적 물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이렇듯 처음 미국에 들어온 신앙인들은 자기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장로교의 뿌리를 둔 성도들인지라 시편의 찬송만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루터파 교인들과 감리교 교인들이 속속 이어 미국으로 들어온 상황 속에서, 서서히 미국교회의 찬송은 바뀌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교단의 압박이나 정치적 관계로 인한 신앙의 핍박은 없었기에 , 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서로 하나가 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분히 민족적 특징을 가진 흑인영가가 흑인들에 의해 교회에서 불려지기 시작했으며, 젊은이들을 위한 감리교의 캠프집회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복음성가의 시작을 가져왔고 , 영국으로 부터 건너온 새로운 노래도 불려졌습니다. 아주 다양하게 각 문화층에 따라 찬송이 불려졌지만 , 그 어떠한 것도 찬송하는 자의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방해하거나 제어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땅에도 사람이 많아지고 그 나름대로의 나라의 정체성을 가지면서 세월이 지나가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문제가 함께 많아지기 시작했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의 힘은 잃어가고 성도들에게 감사와 기쁨의 신앙은 없어지니, 예수를 믿는 이들의 총체적 난국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소위 말하는 미국의 대각성 부흥의 불꽃이 이곳 저곳에서 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부흥회 스타일의 집회가 바로 이 때에 시작된 것입니다. 부흥회 전도지를 뿌리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대형 천막을 짓고, 큰 북을 쳐가며, ‘예수‘
를 외쳐 전하는 그러한 집회 말입니다. 바로 이 때에 사역했던 분들 중에 한 분이 우리가 잘 아는 무디 목사님이십니다.
무디 목사님의 초창기 사역 때부터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를 외쳐도 사람들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걸러가며 이곳 저곳을 다니며 복음 전도를 하여도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큰 시름에 빠진 무디 목사님은 우연히 ‘생키’라는친구와 담소를 나누게 되지요. 그때에 음악을 사용해보라는 친구의 권면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음악을 하는 친구인지라, 당장 노래를 작곡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운 시도를 가지고 복음전도에 달려든 무디 목사님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사람들이 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일어나 손을 들며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노래를 통해 복음 전도의 큰 효과를 본 무디 목사님의 부흥집회는 미국의 찬송의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는데에 충분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찬송가에도 있듯이 생키에 의해 작곡 된 노래의 가사는 찬양의 가사라기보다는 회개와 영접, 또는 다짐의 가사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옵니다
십자가 군병 되어서 예수를 쫒을 때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하지만 이러한 부흥성가들이 처음부터 ‘찬송’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닙니다. 부흥집회 때에 사용하기 위한 노래들을 소책자로 만들어 내기 시작 했습니다. 문제는 겉표지의 제목을 ‘Gospel Hymn’ (복음찬송) 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 기존 교계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찬송의 가사는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찬송의 노래라 할 수 있는가? 심지어 이러한 소책자가 가지고 있는 곡 중에는 외국 민요에 가사만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있는데 어찌 이러한 노래들을 찬송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종류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부득불 부흥성가의 노래책의 이름을 ‘Gospel Song’ 으로 바꾸어 출판해 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미국의 찬송의 전쟁은 지금까지 실천신학적 논쟁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심지어 예배와 전도와의 문제도 심각하게 논의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흥 대각성의 시기를 지나면서 ‘찬송‘의 개념이 많이 바뀐것은 사실 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한국이 미국으로 부터 기독교를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와 부흥집회의 혼합된 개념으로서의 예배를 받아들였고 뿐만 아니라 , 부흥성가의 노래들을 그대로 찬송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 세계 어느 나라의 기독교의 역사를 보더라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 가난하고 지배를 받는 그러한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전달된 부흥성가란 마치 자기네들을 위한 영적 응원가와 같았습니다. 한국 교회음악의 자료는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 음악에는 일자 무식이지만 부르기 쉽고, 왠지 부르기만하면 눈물이 나오고, 비록 서양 음악이지만 우리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의 음악이니 신이 나니 이 얼마나 좋은 찬송인가?”
제가 미국에서 교회음악을 공부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합창음악의 역사’ 라는 과목을 공부하는데 , 미국시대의 합창음악을 분석 하는 시간이 있었지요. 하루는 교수님께서 저에게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철저히 음악을 분석해서 발표하라는 것이었지요. 악보를 받아 보니 , 제가 너무나도 잘 아는 찬송가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를 편곡한 곡이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지요. 저는 ‘this piece'(이 곡) 라는 용어 대신 , ‘ this
Hymn'(찬양) 이라는 용어를 서슴치 않고 사용했습니다. 제 발표가 다 끝난뒤에 교수님은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조금은 다른 질문이지만 , 당신은 정말로 이곡을 찬양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 어떤 깊이있는 생각으로 사용한 단어는 아니었지만, 침식 되어져 있던 ‘찬송’이라는 단어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튀어져 나왔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업이 끝난뒤 그 교수님은 저를 자기 연구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부드러운 예의있는 말투로 이야기하셨습니다. “당신은 목사이니 당신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찬양인 것과 찬양이 아닌 다른 교회음악의 많은 종류가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찬양이 아니라고 해서 질이 떨어지거나 값어치가 덜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 미국의 교회음악이론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던 그 분의 가르침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