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도전의 글 (낸시 거스리) 나눕니다. 

 

나는 출산의 고통이 찾아왔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완벽하게 적응하여서 임신 상태가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출산의 날이 임하였다. 나는 그때 아들을 출산하기 위하여 겪어내야 하는 과정이 너무 두려웠다. 임신도 좋았고, 아기도 좋았다. 그런데 그 분만의 과정과 고통은 두려운 일이었다. 

죽음에 대한 과정도 우리에게 비슷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삶도 좋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도 좋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 그 고통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마주하고 이를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설교자들과 신학자들의 글에 담겨 있는 성경의 진리를 깊이 묵상하다보면 우리는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제임스 패커(J. I. Packer)의 글이 바로 그러하다. 이 글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에 대하여 부정하는 문화들이 팽배해져 있는 오늘의 문화들을 거부하고, 더 아름답고 본질적인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장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소망과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오늘날 죽음은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어가 되었다. 마치 백년 전에 섹스가 언급하기 거북스러웠던 것처럼 말이다. 삶의 무의미함을 조롱하기 위한 냉소적인 표현(예를 들어서, “그저 장난감이나 많이 가지고 죽는 사람이 가장 잘 죽은 사람이다”는 표현)이나 환생에 대한 표현(뉴에이지, 셜리 맥클래인(Shirley MacLaine))을 빼면 죽음은 병원을 제외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 주제이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죽음을 말하면 왠지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종종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앞에 놓인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 역사의 교훈과도 맞지 않는 태도이다. 또한 이는 어떻게 죽을지 알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어떻게 살지를 알 수 있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지혜에도 맞지 않는 태도이다. 

사실 과거와 오늘날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 이전의 모든 세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삶을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로 여겼다. 중세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청교도들, 이후의 복음주의자들도 모두 죽음에 대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로 여겨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외쳤다. 이는 병적인 망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혜였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 삶에서 분명히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타조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나그네 의식을 잃어버렸는가? 이는 몇 가지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벌어진 일이다. 

첫째, 오늘날 죽음은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져버렸다. 20세기 이전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10세가 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정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죽음에 대하여 잊고 살게 되었다. 

둘째, 현대의 물질주의는 필연적으로 이 땅의 삶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까지도 오염시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 땅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셋째,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의 하늘 소망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소망을 말하면서 이땅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늘 소망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넷째,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빈약한 문화의식, 사회에 대한 무관심, 빈곤한 인권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천국에 대한 갈망을 가지는 것이 현실 도피적이거나 병약한 것처럼 생각하며 위축되었다. 

다섯째, 인간은 영원한 존재라는 자의식은 과거에는 “영혼의 위대함”이라는 말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정신 없이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 영원에 대한 의식을 잊어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죽음을 다시 생각할 수 있을까?

1. 육체의 죽음은 죄에 대한 창조주의 심판으로 인하여서 주어졌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보여주는 외면적인 상징이다. 구원의 은혜가 없다면,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더욱 깊고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진실로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망의 쏘는 것이 없어졌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날을 구원자와의 만남의 날로 만들어버렸다. 우리의 구원자는 그리스도인들을 안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안타깝게도 잠시 육체가 없는 상태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있을 수 있기에 훨씬 더 좋은 일이다(빌 1:23). 

3. 그리스도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지혜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휴일이 되면 멀리 여행을 떠날 것을 기대하면서 미리부터 짐을 싸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4. 이 땅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기 위하여 우리가 기억할 말은 “매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라”(토마스 켄(Thomas Ken))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과 오늘에만 집중하라.” OMF 선교회의 임원이었던 프레드 미첼(Fred Mitchell)은 선교지에서 갑자기 본국으로 소환이 되었을 때 이 말을 하였다. 그런데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그는 마지막을 맞이하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대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전기의 제목도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조종사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인 “궤도에 오르다”(Climbing on Track)였다. 나는 그의 말들을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5. 잘 죽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사명 중 하나이다. 육체적 죽음의 과정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죽을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영적으로는 꽃이 활짝 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가 잠시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의 첫 번째 생일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두 번째 생일이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서 영원한 나라에 입성하는 것은 우리의 세 번째 생일이라 할 수 있다. 

함마르쉘드(Dag Hammarskjöld)는 기독교를 생각하면서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학은 생명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죽음에 대한 진리가 마음에 바로 자리잡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바르게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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