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목요일

 

예수님의 못자국에 관한 귀한 글 (데이빗 메시스) 나눕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소중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죽으셨을 때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셨다. 하지만 그 몸은 다시 살아난 부활체였을 뿐 아니라 변화된 몸이었다. 여전히 사람의 몸이었으나 영광스럽게 된 몸이었다. 썩을 것으로 심었으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고전 15:42). 닫힌 문과 벽도 통과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요 20:26) 생선 같은 음식도 드실 수 있었다(눅 24:42). 갈보리에서 죽임을 당한 그의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고전 15:44). 완전히 새롭게 된 그의 몸이었기에 그와 가장 가깝던 이들조차도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눅 24:16, 27; 요 20:14; 21:4). 하지만 머지않아 그가 실로 예수님임을 알아보았다(눅 24:31; 요 20:16, 20; 21:7).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멋진 사실 중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그의 못자국에 대한 것이다.

내 손을 보라

부활 후 변화된 몸을 입었지만 여전히 동일한 예수님 자신임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줄 때 예수님은 주로 그의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처음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 라고 기록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눅 24:39–40)

사도 요한도 예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요 20:20) 라고 기록한다. 요한은 곧이어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라고 쓰면서 도마의 의심에 대해 묘사한다.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겠노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고, 여드레를 기다리신 후에 도마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마침내 다시 찾아오셨을 때 도마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못자국 속의 보화

누가나 요한이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그의 부활체에 못자국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의 완전케 된, 새로운 차원의 육신에 못자국이 있다는 것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사실, 처음에는 못자국이라는 것이 어떤 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는 썩어질 몸이었으나 부활 후에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개선되었기에, 이 땅에서 당한 고난의 흔적이 부활체에서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

그의 아들의 영원히 영광스럽게 된 몸에서 못자국을 없애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었을 거라 지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못자국을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피부가 큰 상처로부터 회복된 후에는 흉터가 남도록 만드셨다. 어떤 흉터는 별 의미 없는 것일 수 있으나 어떤 흉터에는 얽힌 사연이 많을 수 있다. 어떤 상처였느냐에 따라 그 상처가 남긴 흉터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도 하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누가와 요한 모두 예수님의 부활체의 못자국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한다는 것은 그의 못자국이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라는 뜻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영광스럽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담긴 우리가 영원히 누릴 보화는 무엇일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라

먼저, 예수님의 못자국은 그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그는 완전히 인간이 되신 분이고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히 2:17)을 경험하심으로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못자국은 그가 인간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회자요 시인이었던 에드워드 쉴리토(Edward Shillito, 1872–1948)는 제1차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했으나 인간이 겪는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아시는 “못자국을 지니신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너무도 고요한 하늘은 우리를 무섭게 하고

온 우주에 우리 쉴 곳은 없네

상처가 쓰라릴 때 나의 위로는 어디에 있나?

못자국 지닌 예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셨으므로 그의 못자국은 자신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찬송가 작가인 매튜 브릿지스(Matthew Bridges)는 못자국에서 그 사랑을 보았기에 1851년에 쓴 찬송시를 통해 “사랑의 주님”께 면류관을 드렸다.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그 손과 몸의 상처가 영광 중 빛나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못자국은 이제는 아문 상처이고, 그 못자국은 예수님의 최종적 승리를 우리에게 영원히 선포한다. 요한계시록은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는데, 우리의 구주, 즉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하늘의 중앙에 서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다(계 7:9–10, 17; 22:1, 3).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부터 시작하여 모두 스물여덟 차례에 걸쳐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다. 천국에서 찬송하는 천사들은 그 앞에 엎드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선포한다. 또한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계 13:8 및 21:27)으로 묘사된다.

그의 고난과 그가 흘리신 피를 결코 잊지 않는 그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못자국을 지닌 양, 그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어린 양으로 영원히 송축한다(계 7:14). 또한 그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여전히 선명한 못자국을 통해 흘려진 피로 우리의 대적을 이긴다(계 12:11).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못자국을 보며 영원히 그를 경배할 것이다. 그의 못자국은 구속된 이들의 눈에는 결코 수치가 아니다. 이는 구원 받은 죄인들을 위한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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