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관한 글 (로이 메이즈) 나눕니다. 

 

관계는 왜 이렇게 꼭 복잡해야만 할까? 왜 좋은 친구들도 서로 간에 ‘복잡한 상황’을 맞아야 하는 걸까? 왜 가족끼리도 사이가 벌어져서 몇 년 동안 말도 하지 않는 그런 관계가 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적이자 동시에 서로 간에도 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바로 화해의 메시지다(그것은 서로 갈라진 관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묶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바울이 쓴 화목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그 의미는 적대감과 적개심 또는 악의를 종식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소통은 방해받았고, 그 관계는 깨어졌다. 이사야 59장 2절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에게는 그의 백성에게 사랑을 다시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적인 회복책이 필요했다. 극단적인 회복책은 십자가 예수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왔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우리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하길 원했다. 하나님 은혜의 수혜자는 이제 이런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메신저가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린 능력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준다. 옛 생각, 옛 행동, 옛 의견, 옛 성격과 태도는 사라졌다. 그것들은 이제 다 죽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남자와 여자는 이제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나님이 화평을 위해 우리에게 하신 일과 같은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바로 그런 극단적인 관계의 회복을 우리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예수님은 그 죄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려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기 자신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주된 이해 당사자처럼 행동했다”(‘순전한 기독교’). 하나님이 바로 모든 갈등에서 ‘가장 상처를 받는’ 존재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하찮은 인간이 상처와 분노를 잊어 버리고, 너무도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죄가 궁극적으로 하늘 아버지를 대적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문제는 이 화목하게 하는 의사 소통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감정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화목이 필요함을 깨닫도록 하실 때에야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세상에 만약에 갈등이 없다면 화목에 대한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 죄를 짓는다. 또는 서로 다른 이의 죄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갈등이 싹튼다. 자존심, 잘못된 가정, 분노, 그리고 마음의 쓴뿌리는 다른 이들의 행동 또는 태도 때문에 생긴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을 때, 화목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오해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죄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성경은 또한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러나 죄가 특별히 큰 상처를 주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가지거나, 또는 교회의 권징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하다면, 거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18장 15-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당연히 갈등의 당사자들에게는 사적인 소통이 훨씬 더 편할 것이다. 갈등이 막 시작됐을 때 특히 더 필요한 명확하고 온유한 소통은 잘못된 가정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또 당사자의 영혼에 지속적인 슬픔을 초래하는 성급한 조언을 막을 수 있다(시 13:2).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엡 4:15). 그것은 말을 할 때, 인내와 온유함을 가지되, 자랑, 거만, 무례, 초함, 그리고 원한을 갖지 않는 것이다(고전 13).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화목을 전달하는 소통의 본질이다. 

우리는 왜 그래야 하나? 왜 이런 수고를 해야 하나?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그의 백성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하나됨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요한복음 17장 20-23절에서 기도했다.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관계를 해치는 갈등의 문제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명성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도망가게 한다. 쓴뿌리와 원한은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함을 사라지게 한다. 회피는 다른 이와의 열린 관계가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감정의 근원에는 자만심이 있다. 어쩌면 말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진짜 칼과 총 때문에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수도 있다. 음주 운전자로 인한 교통사고일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이들 간의 잡담에서 나의 인격이 묵살당했을 수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시편은 상실과 아픔 속에서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선한 이름이 바로 보존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의로운 분노가 되어야 한다(시 37:7–13; 4:4–8; 13:3–6; 55:12–14, 19–23).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 숙고하고 생각하라. 무엇을?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짐으로써 상실했던 진리의 달콤함과 풍성함,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고 또 우리와 화목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제 우리가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할 때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하실 때 하셨던 방법, 우리의 죄를 동쪽에서 서쪽이 먼 것처럼 제거하시고(시 103:12)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더이상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바로 그 방법으로 하도록 만드신다. 

때로는 화해에 실패할 때도 있다. 다시 소통의 길을 열어서 의미가 있는 관게를 회복하는 게 불가능하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럼 화해의 노력을 끝내고 화해하지 않은 당사자 간에 반목만 더 커지도록 놔둬도 될까? 아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할 기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 6:27).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는 있기 마련이고 친구로서 회복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계속 사랑해야 한다(롬 12:17-19 참조). 어떻게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까? 그가 우리에게 바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10). 

화해는 고통스런 과정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해하신다. 하나님에게 화목은 그에게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서 그의 아들을 죽이는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이 세상의 원수와 화목하기 위해 아들을 데려다가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는 대신 자만심을 버리고 그가 보여주신 화목의 메시지를 다른 이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그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런 노력이 실패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에게 이타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는 우리가 이제는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행동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임을 기억하라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Similar Posts

  • 6월 4일 화요일

    히브리서 3장 7-19절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형제들아…

  • 12월 29일 주일

    시편 148편 1-14절 1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데서 찬양할찌어다 2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찌어다 3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찌어다 4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찌어다 5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6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8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9산들과…

  • 3월 30일 화요일

      출애굽기 14장 13-16절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 4월 8일 금요일

      에베소서 1장 20-23절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 6월 21일 수요일 (신26 시117,118 사53 마1)

    신 26 장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 9월 12일 토요일 (시편 135-138편)

      1. 시편 136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영원하심’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함이란 ‘착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착하십니다. 한국말로 착하다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밑의 사람들에게 쓰는 용어인 것 같아서, 아마도 한국 성경책에는 ‘선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편 136편에서는 선하시다라는 표현 대신에 인자하시다라는 말로 쓰여져 있습니다. 착한 어른을 인자하신 어른이란 말로 바꾼다면…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