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샘 엘베리)을 나눕니다. 귀한 도전이 되길 바랍니다.
어떤 목회자가 언젠가 내게 말하길, 주일에 교회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너무도 자주 ‘목회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곧 덧붙여 말하기를 일단 예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진다고 했다. 그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교회에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 순간이나 그런 시기가 닥치면 너무도 쉽게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해버린다. 눈이 조금이라도 왔다거나, 목이 약간이라도 따끔거린다거나, 월요일까지 마쳐야 하는 일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교회에 가지 않을 이유들은 넘쳐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교회에 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0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두 가지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교회에 빠지는 습관은 오늘날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다. 이천 년 전에도 언약 공동체에 참여하는 불편을 피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미 있었다. 아주 오래전 매우 다른 상황 속에 살던 이들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습관이 있었다면 이는 현대인의 문제라기보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마다 습관적으로 교회를 빠지고자 하는 유혹은 늘 있었다.
하나님의 격려
히브리서 10장 24–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우리를 믿음 안에서 격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격려를 통해 믿음 안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디자인하셨다. 다른 이들 역시 우리의 격려를 필요로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두 가지를 잃게 된다. 당신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격려를 받을 수 없고, 그들도 당신의 격려를 받지 못한다. 당신은 교회에게, 교회는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다.
이를 깨달으면,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에 빠지게 되는 두 가지 가장 흔한 원인에 대항할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교만과 낙심이다.
교만
당신의 여생이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고 그에게 쓰임 받는 데 당신의 삶을 보내고 싶은가?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신도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다른 이들 역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그의 백성들이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방식이다.
지역 교회를 벗어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격려를 충분히 얻을 수 없고,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도울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 없이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이 지역 교회를 통해 내게 주시는 격려가 없어도 살 수 있어.’ 그 ‘격려’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이다.
사도 바울 역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몸의 각 지체에 비유했다. 어떠한 공동체에 가든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를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살아있는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눈은 더는 볼 수 없고 머리 역시 기능하지 못한다. 이 지체들이 몸에 붙어있을 때는 아무도 그들의 유용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다른 지체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한 눈이나 머리처럼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주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심지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교회도 굳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하거나 다른 이들의 지원과 도움 없이도 그들은 독자적으로 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몸에서 떨어져 나온 눈이 뭔가를 볼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이다.
낙심
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이’ 교회 공동체에 별 필요 없는 존재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라 느끼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어떤 것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들은 바울의 비유에 나온 눈이나 머리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몸에서 덜 중요한 지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도 잘 알고 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고전 12:15).
이메일 쓰기, 장바구니 나르기, 먹기, 또는 피아노 치기처럼 손이 하는 일을 발이 하려고 한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있어 발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손이 늘상 자기가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발을 통해 몸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별 볼일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해도 성경의 가르침은 확고하다. 당신이나 다른 이들 모두 똑같이 교회에 중요하다. 하나님께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히브리서 말씀으로 돌아가보자. 이 본문은 우리에게 서로 권하라고 한다. “영적으로 충분히 앞서 있는 이들로부터 권함을 받아”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라.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었건 어리건, 우리의 재능과 은사가 어떤 것이건 누구나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존재다.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다. 당신은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당신이 그런 식으로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똑같은 이유로 낙심한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기도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해 당신이 얼마나 무관심하든, 얼마나 두렵게 느끼든 상관없이, 교회로 향하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기도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적어도 한 가지 일로 큰 격려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격려받는 일에 대해 ‘마음을 열라’. 그날 부른 찬양곡의 가사일 수도 있겠고 예배 중 대표 기도나 설교의 한 대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예배 전이나 후에 누군가가 당신에게 해준 한마디 말로 인해 격려를 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 이를 구하라. 하나님은 진실로 당신을 격려하고자 하신다.
둘째, 적어도 다른 사람 한 명에게 당신이 큰 격려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당신이 해주는 말을 통해 그리 할 수도 있다. 내키지 않을 때에라도 신실하게 교회에 나와 섬기는 당신의 모습을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격려가 될 수 있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바로 떠나지 말고 적어도 한 사람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라. 나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누구와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커피나 간식을 먹으러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회중석에 남아 주위에 있는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백성으로서 함께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도록 우리를 디자인하셨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고자 하신다. 교회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분을 신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