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목사님의 글 나눕니다.
사람들이 갈라디아서 6장 3절을 독립적인 격언처럼 취급하곤 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전체 교훈의 일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라고 말한다. 물론 그 자체로 맞는 말이고, 독립된 격언으로서도 옳은 말이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기기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깊은 겸손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섬기는 삶, 즉 자기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진심으로 노력하는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이뤄가는 삶을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무척이나 단호하다. 바울은 사실상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기억하라.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 11장 9-13절에서 예수께서 지나가듯 주시는 가르침과도 연결되는데, 기도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쉽게 말해 “내 아버지께서는 너희들이 구하기만 하면 주실 것이다”이다. 그러나 곧이어 예수께서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데, ‘너희가 악할지라도’라고 하신 것에 주목하라. 놀랍게도 자기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들은 악하지. 맞아, 바로 내 제자인 너희들 말이야. 너희들은 악해.”
복음의 반(半)이 바로 이 메시지, 즉 우리는 악하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의 자신감을 고양해주는 사람들과만 인간관계를 맺는 것으로 이 메시지를 피해가려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축 처지고 허약한 자존감을 세워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나 관계를 찾아 헤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위험한 태도이며, 무척이나 슬픈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아무런 효과도 없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너덜너덜하고 허약한 것은 당신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분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환호와 갈채와 칭찬을 다 모아도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바라보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시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의 마음을 치유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짐이 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과 5절은 거의 각주 역할을 한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그런데 내가 살펴본 주석가나 설교자들은 모두 이 두 구절을 약간 다르게 해석한다.
바울은, 진실로 마음의 치유를 받았다면, 즉 허약한 자아를 북돋울 방편으로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비교하지 않게 되면, 성장할 수 있다는 진정한 자신감이 당신 안에 변함없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당신만의 짐을 지는 일에 있어 진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5절에 나온 ‘짐’(load)은 2절의 ‘짐’(burden)과는 다르다. 2절의 ‘짐’은 짓누르는 무게라는 함의가 있지만 5절의 ‘짐’은 단순한 화물이나 수하물, 즉 우리가 여행할 때 들고 다니는 정도의 짐을 뜻한다.
수년 전 어떤 연세 지긋한 목회자가 내가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내가 섬기던 교회에 한 가정이 출석했는데, 신앙이 있는 이들이었지만 그 가정에는 결함이 많았다. 그중 한 명에 대해 내가 느끼던 짜증스러운 감정을 표현했을 때 그 목회자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은 알고 계시지요? 우리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인해 좋은 가족의 복을 누렸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요. 그래서 자제력도 상당하고 상대적으로 적응력도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말하자면 10점 만점에 3 정도에서 시작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라기 시작한 지 한 5년쯤 후에는 3.5 정도까지 성장합니다. 자, 이제 그 가정을 한번 보시지요. 그분들은 시작이 아주 힘들었겠지요. 그 남편분과 아내분 모두 예전 가정 상황이 아주 안 좋았습니다. 그랬던 분들이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일반은총 면에서 보자면 0에서 시작한 것이죠. 만신창이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신앙을 가진지 5년 후에 그분들은 이제 1.5가 되었습니다. 이분들이 이룬 진보는 정말 대단한 셈이에요. 심지어 우리보다 더 대단한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보며, ‘그래도 내가 저 사람들에 비해 사랑이나 자제력이 적어도 두 배 이상은 되네’라고 말한다면, 그분들에게는 그분들의 짐이, 그리고 내게는 나만의 짐이 있다는 걸 깜박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말미에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믿음 때문에 순교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베드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쉽게 말해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였다. 함께 걷고 있던 요한이 보이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쳐다보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주신 실로 탁월한 답변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였다.
나는 C. S.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이 아이들에게 “너에게는 네 이야기만 해준단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썼을 때 분명히 요한복음의 이 장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냐고 내게 묻지 말아라.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짐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네 눈을 하나님께 두라.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 자꾸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이다.
몇 년 전, 가톨릭 작가이며, 널리 알려진 선교사인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과 남매지간이기도 한 톰 하워드(Tom Howard)의 묵상집을 읽었는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풀어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워드는 그 책에서 성전(temple)을 보라고 주문했다. 하나님은 성전과 회막을 위해 상세한 건축 안내도를 주셨는데 모든 것이 그가 주신 규격에 맞게 정리되어 있었다. 성전 중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온 우주와 실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성전 중앙은 어떠한가? 그곳에는 아무런 형상도 없다. 엎드려 절할 만한 어떠한 형상도 없는 것이다. 하워드에 의하면, 사실 거기에는 사람이 아닌, 사건이 존재한다. 실제의 심장부에 놓인 것은 황금판, 즉 속죄소이고 그 아래에는 언약궤, 즉 율법이 있으며, 그곳에 피가 뿌려진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의 중심, 창조와 구속의 중심은 바로 “내 삶을 너희를 위해 주노라”임을 말씀하신다.
내 삶을 너희를 위해 주노라
죄는 우리로 하여금 “네 삶을 나에게 줘. 네가 날 위하도록, 내 이익과 이미지를 위해 희생하게 만들거야. 내 필요를 위해 너의 필요는 포기해”라는 생각에 매달려 살게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내 삶을 너희를 위해, 너희를 섬기기 위해 주노라. 내 삶은 너희를 위해 부은 바 되었고 나는 너희를 위해 희생하노라”고 선언하시며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그리고 매순간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이라 말씀하신다. 둘 중 어느 것을 택할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
부모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루 계획을 멋지게 세워놓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아이가 아프거나, 아이가 뭔가 필요로 하거나, 아니면 자지러지게 울 때, 당신은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가? 당신이 “얘야, 나는 너를 위해 내 삶을 준단다”라고 하며 죽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당신은 자녀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당신 자녀는 사랑받는다는 확신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은 죽고 당신 자녀는 사는 것이다. 당신이 전혀 희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부모이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죽지 않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자녀에게 늘상 “미안, 나도 할 일이 있고, 일정도 있고, 이루고 싶은 일이 있어. 방해하지 마”라고 말하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 자녀는 상처받은 채 자라게 된다.
모든 진실한 사랑은 대속적 희생, 즉 “내 삶을 너를 위해 주노라!”를 전제로 한다. 바울은 결국 “‘내 삶을 너에게 주노라’를 원칙으로 삼아 살아가고 관계를 형성해갈 수도 있고, ‘네 삶을 나에게 바치라’라는 오만한 옛사람의 길로 갈 수도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