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에 힘을 내게 하는 귀한 글 (마샬 시걸) 나눕니다. 

 

지금 시대에 열심(Earnestness)은 워낙 드물기에 그 가치가 더 인정받고 있다. 화면 스크롤링과 대충 읽기로 대표되는 이 시대는 대체로 우리를 더 가볍고 피상적이며 유약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심각함에 점점 더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우리 마음은 너무 쉽게 지친다. 

그러나 극히 소수가 되어버린 그 밝은 삶은 이런 영적 안개를 뚫고,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에겐 이제 희미해져 버린 현실 속에서조차 환히 빛나고 있다. 그들의 말과 우선순위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그리스도께서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헌신을 하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신음하고 변명할 때 희생하고 섬기기를 좋아한다. 역경에 직면했을 때조차도 그들은 더 강하고, 갈등 속에서도 더 친절하며,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즐거워 보인다. 그들은 스트레스와 산만함조차 뚫지 못하는 초점(focus)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는(종종 그런 그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감각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진짜 세계, 그리고 영혼을 위한 영적 전쟁을 그들이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성도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고린도후서 8장 7절의 말씀대로 열심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열심에 게으른

그리스도인의 열심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안정되고 기쁨으로 가득한 집중(intensity)이다. 히브리서 6장 11-12절을 보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열심은 영적 둔함, 게으름, 무관심, 안일함의 반대이다. 모든 신자가 그렇듯, 열심인 사람도 예외없이 의심과 갈등, 그리고 낙심의 계절을 겪는다. 그러나 그런 때에 조차도(아니, 특히 그런 때에 더) 믿음의 불꽃은 생각보다 더 뜨겁고 밝게 타오른다. 

이런 영적인 불이 또 어디에서 언급되었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고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 구절만으로도 진지한 반성과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열심에서 나태해짐을 느끼는가? 얼마나 자주 영적 불타오름을 느끼는가?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이가 얼마나 쉽게 지속적인 나태함에 익숙해져 버렸는가? 한때 가지고 있었던 열심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믿음을 위해 매일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은 종종 둔감함이라는 참호에서이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에게는 다가올 날을 위한 새로운 깨어있음이 필요하다.

불붙은 죄인들

열심이라는 이 단어(그리스어 spoudei)는 고린도후서 7-8장에서 가장 자주(네 번) 나타난다. 이 두 장에서 사도는 죄에 대한 경건한 근심과 불경건한 근심 사이의 치명적인 차이점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파멸시키려 했던 이들을 징계하는 일에 등한시했다. 그래서 이전에 고통스러운 편지(고후 2장 2절 참조)를 썼을 때, 바울은 진심을 담아서 그들을 근심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경건한 근심(grief), 회개하는 근심, 희망에 찬 근심,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근심을 경험하기 원했다. 그건 많은 사람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종종 죄의 결과에 대해 느끼는 천박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근심이 아니다. 그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죄에 직면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했을까?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고후 7:12).

바울은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할 때, 그들의 눈에서 그분을 향한 간절함을 보기 원한다고 말한다. 그 편지로 인해 그들 속에서 영적인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길 바란다. 

그래서인지 고린도 사람들은 쉽게 근심했다. 바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그들은 자신의 죄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냉정하며 거기에 능동적인 현실감으로 충만했다.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진지한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헌신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진지한 사랑까지 낳는다. 

자, 기억해야 할 점은 이러한 깨어있음과 열심이 다름 아니라 바울이 어렵게 전했던 말이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불쾌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책망은 종종 더 큰 영적 온전함과 활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초대이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초대를 놓치고, 그 초대로 인해 경험할 지도 모르는 뜨거움 마저 잃어버리곤 한다. 

열심 안에서 자라나기

열심이 부족했던 고린도 성도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그 열심이 커졌다는 것은, 아무리 영적으로 더디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도 간절하게 바랄 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심을 다하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단어는 베드로후서 1장 3-8절에 다시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등등.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열심 위에 너희의 믿음과 덕을 더하라.”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열심에 대해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보여준다.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더 높은 수준의 우선순위와 함께, 더 확고한 기반 위에서 지속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차마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까지도 활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열심의 토대

첫째,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더 견고한 기초 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수준으로까지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산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3-4). 과연 이러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확신이 무엇인지 유의하자. 

–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의 영광과 탁월함 가운데로 부르셨다.

– 하나님은 그의 귀하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모두 주셨다.

– 하나님은 우리를 신적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닮아가도록 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부패함에서 건져내셨다.

이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깨어있음은 우리 영혼 속에서 중심점(gravity)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자유함을 준다. 영혼 속 중심점과 자유는 상황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각 사람 아래에 단단한 기초를 형성한다. 그 결과 견고하게 고정된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사랑 안에서 더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열심을 추구하는 과정의 일부는 우리 발아래 놓인 땅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앞에 두신 반석 위에서 삶과 사역을 세워가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로 아침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현실에 대한 바른 발판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세상 것에 몰두하고 있는가?

열심의 방향

안전과 안정 외에도 영혼에게는 방향이 필요하다. 열심을 다한다고 할 때, 그 열심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아예 고갈될 때까지 방해받지 않은 열정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그들의 모든 방향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기쁨으로 가득 찬 경건한 열심의 경우에는, 그 모든 노력이 하늘의 우선순위와 일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5–8).

열심을 내는 사람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는 시간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영역 때문에라도 세상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보다 영적인 관심사와 기회에 전념하며, 그렇게 하는 것을 즐긴다. 

열심을 내는 사람은 세상과 사랑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딤후 4:10), 아무리 절박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결국에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릴 세상일에 최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은을 찾듯이 진리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갈망과 충동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달성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보다 경건을 더 소중히 여긴다. 조금 사랑하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고,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빌 1:9) 되기를 원한다. 

열심의 우물

믿음과 확고함 그리고 거룩함과 사랑에 대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 안에서 견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짐을 지고 갈 수 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생명과 경건에 관해서 우리는 스스로 무력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마음과 관계라는 측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양의 기능 장애를 우리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제를 우리 자신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우리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바로 이 우물 옆에 집을 짓는다. 그들은 하늘의 힘, 지혜, 용기, 사랑의 보고를 쓰는 방법이 기도 밖에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소중하고 위대하고 구체적인 약속으로부터 끊임없이 그 능력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이 없이 자신들이 한 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노력을 다하라

아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의 삶이 지속적으로 주변에 가득한 세속성을 뚫고 초자연적인 특성으로 빛나고 있는가? 누구의 말과 행동이 긴급함과 인내, 야망과 겸손, 그리고 배고픔과 만족으로 특징지어 지는가? 누구와 나누는 대화가 당신으로 하여금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도록 자극하는가?

그런 성도들을 연구하고, 친구가 되고, 또 본받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 그들의 삶은 천박하고 산만한 시대에 귀중한 간증이자 깨달음(reminder)이며, 그런 이들과의 우정은 무엇보다 매우 소중하다. 게으름을 부릴 때 느끼는 편안함을 거부하라. 열심을 내는 데에 그 누구보다 앞선 사람이 되도록, 그런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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