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초점
우리가 드려야할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 모른다거나 부인할 교인들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음을 분명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또는 두번씩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이 얼마만큼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인지도 확연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예배의 확실한 두꺼운 뼈대에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는, 주일 예배에 참석을 못할 때는 무거운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내가 지금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경배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세만 잡고 있는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지금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며 신령과 진정의 마음으로 드렸다는 뿌듯하고 벅찬 영의 충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큰 문제를 삼지를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예배자들은 예배를 통해 소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
라는것을 체험하고자 한다. 그래서 은혜 있는 예배니, 은혜 없는 예배니 따위의 말들을 너무나도 쉽게 한다. 성경에서는 예배의 이야기를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으며, 이 예배의 이야기를 히브리서 기자는 왜 믿음의 모습으로 재해석하며 강조 하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한다. 다시 말하면, 아벨의 제사는 믿음이 있는 제사였으며 가인의 제사는 믿음 없는 자의 제사였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되어 있는 믿음의 조상들의 증거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 믿음의 모습은 순종의 모습으로 해석 될 수 있음을 본다. 바로 이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별다른 큰 믿음의 사적이 없이도 죽음을 보지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에녹에 대한 증거가 이를 설득력 있게 검증해 주고 있다. 바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는 참 명제가 성립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벨의 제사는 순종의 제사였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의 방법인 ‘피의 제사‘ 를 아벨은 순종하였고 가인은 순종하지 않은채, 자기의 방법대로 드렸던 것이다. 질서에 대한 거부와 파괴의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 우리의 인격속에 너무나도 깊이있게 뿌리 박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나와 남들을 비교해가며 이기는 것에 대해 강요받고 자라지 않았는가? 교회에서 조차도 성경퀴즈니, 찬송경연대회니, 무슨 대회니 해가며 이기는 사람은 칭찬 받고 공책과 학용품을 상품으로 받으며 성공하는것에 대해 큰 매력을 심어 주지 않았는가? 이러한 교육환경의 공해속에서 자란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왕으로 모셨다 하더라도 그 위의 대왕은 ‘나 자신‘ 이다.
이렇게 잘못 자리 잡은 나 자신을 철저히 쳐서 십자가에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며 이 훈련의 시험대가 바로 예배여야 한다. 그 분이 왕이신 것을 고백해야 하는것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예배를 통한 기쁨은 나 자신의 모습이 사라짐을 체험하는 아픔이 있는 기쁨이어야 한다. 더럽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겠는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가 충만한데 은혜가 있니, 없니를 따지는 예배자는 현대의 가인이다. 예배 드리는 자로서 준비를 못 갖춘 채, 영적인 뜨거운 뭔가를 기대하는 예배자들 또한 현대의 가인이다. 자기의 스타일을 주장하며 자기와 맞지 않는 순서나 내용을 비판하는 예배자들, 현대의 가인이다. 구체적인 현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위해 애통해 하며, 영의 곤고함을 느끼는 자들은 겸손이 무엇인지를 안다. 이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갖고 최후의 순종의 종착지인 예배의 현장으로 나오는 자들, 바로 그들은 알고 있다. 예배의 모든 초점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