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글 나눕니다.
“나는 누구인가?”
많은 철학자들이 던졌던 질문이지만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은 태어날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태어난다. 그래서 중요한 타인들(The significant others) 에 의해 자신의 자아상을 정립하기도 하고, 대부분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누구보다 더 잘하는 것, 못하는 것 등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립해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을 이야기 하지 못한다.
여러 일반 서적들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안에는 이중적인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닮은 고귀한 면이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죄인으로서의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며 또한 죄인된 본성을 가진 이중적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은 늘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양극단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창 2:25) 완전한 연합의 관계였지만 죄가 들어온 이후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창 3:7) 스스로를 가리게 된다. 서로를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서 가린 것이다. 죄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남겼고, 인간은 그것을 가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오늘날에는 학벌, 외모, 능력, 직업 등으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외부의 무엇으로 삼을 때가 많다. 인간은 스스로 부끄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의 수치심을 다양한 것으로 가리고 살기 때문에 자신의 외면을 보면서 괜찮은 사람이라 착각하지만 누군가의 비난이나 실패 앞에서면 내면의 수치심 때문에 또 좌절하게 된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인간의 정체성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팀 켈러는 복음의 능력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첫째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센터처치, 99쪽)
복음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고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던 왜곡된 이중적 정체성을 하나로 통합시켜 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만 깨달으면 절망하게 된다. 살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목숨을 스스로 끊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용납되었다는 사실만 주목한다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정체성과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하나가 되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죄가 얼마나 큰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저렇게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면서 죽으셨을까 하며 깨닫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저렇게 큰 고통을 감당하시면서도 나를 구원하셨을까 하며 생각하게 된다. 십자가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에 대한 깊은 회개와 동시에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된다. 죄인됨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가지 사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죄인인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한 자신을 ‘근심한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 라고 고백한다.
팀 켈러는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면서도 담대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겸손과 담대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인간의 성품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온유한 사람’ 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와는 다르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야생말을 길들인 성품을 말한다. 그냥 착하기만 한 사람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한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말을 함으로 죄를 지을 때가 있고, 말이 없이 과묵한 사람은 말을 해야 할 때 말하지 않음으로 죄를 지을 때가 있다. 겸손과 담대함이라는 두 가지 성품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생득적 자질이 아니라 오직 복음 안에서만 가질 수 있는 균형된 이중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이유는 내가 죄인 되었음을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나는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자녀이다. 그래서 겸손하면서도 담대한 삶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겸손하기 때문에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 않게 된다. 자기 자신을 향한 기대나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담대함이 있다. 또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게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죄인된 나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정체성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자신의 실패에 너무 좌절하는 이유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성공에 쉽게 교만하게 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담대함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이룬 일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정체성은 다 균형을 이룰 수 없다. 실패 앞에 좌절하고 성공 앞에 교만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된 나를 향해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또한 성공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룬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좌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다 죄인된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지만 여전히 죄인된 존재이다.
이것이 어떻게 균형된 정체성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복음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또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죄인이기에 겸손하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에 담대할 수 있다. 실패 앞에 좌절하지 않고 성공 앞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오직 복음 안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