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영성에 관한 글 (데이빗 스트레인) 나눕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이제 막 검토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 삶의 구조를 형성하는 건축학적 원리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영성에 미치는 몇 가지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확실히 영성이라는 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다. 일반적으로 이 영성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것은 주관적인 영적 경험 내지 정신적 또는 정서적 웰빙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영성을 동양의 명상 및 마음챙김과 같은 수행과 쉽게 연결시킨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영성은 그런 사고 방식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영성의 중심이 무엇인가, 즉 영성이 추구하는 대상 내지 초점(focal point)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성 모델에서 초점은 언제나 자아이다. 우리는 체험하기 위해, 그러니까 영성이 약속하는 웰빙 감각을 위해 영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영성에서는 체험이 비록 현재적이고 생생하고 풍부할 뿐 아니라 실제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건 결코 목표가 아니며 동시에 자아도 초점이 아니다. 기독교 영성의 초점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을 알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 그렇기에 기독교 영성에서도 자아에 대한 생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건 매우 작을 수밖에 없다. 영성에 대한 이런 기독교적 관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만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일단 영성을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성경적 훈련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깊은 교감이 점점 더 커지도록 추구하는 것, 나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나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야말로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 그리고 그 교제가 깊어질 수 있도록 돕는 모든 은혜의 훈련과 습관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연합은 교제로 이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다른 보혜사, 그가 진리의 영이라고 부른 이를 주시도록 간구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다른 보혜사”라는 구절은 같은 종류의 또 다른 돕는 이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 아버지께로 떠나셨지만, 그분은 당신과 같은 성품을 가진 다른 조력자를 보내겠다고 하신다. 이 조력자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동시에 그들 안에서 거하실 성령이시다. 그러나 18-19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연결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지금은 떠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 이 구절은 부활이나 세상 끝날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도록 만든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 안에 거하신다. 예수님께서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9-20)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지금 성령으로 인한 권능의 결과를 말씀하고 계신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예수님은 20절에서 그 연합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교통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연합과 친교가 있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그 영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와의 바로 그 연합과 친교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또 중재하신다. 성령의 사역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경험하고, 또 누리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목적을 서술한 바로 그 내용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이 전한 복음을 믿게 될 때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와 교제함으로 누리는 충만한 영광은 무엇인가? 단지 성도 간의 사귐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사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범위와 영광은 실로 놀랍다. 복음을 믿어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과의 교통함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에베소서 2장 18절을 살펴보자.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심으시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체험적인 기독교, 느낄 수 있는 기독교를 위해 호소하고 있다. 나는 지금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를 위해 간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교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더 풍성해지도록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성령께서 항상 하시는 일이다. 기독교인은 결코 합리주의자가 아니다. 기독교인은 초자연주의자이다.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진정한 의사 소통과 친교, 그리고 교제를 불러 일으키시는 성령을 믿는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게다가 우리의 신학이 단지 교리와 실천으로만 만족하고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우리가 아직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합, 교제, 그리고 은혜라는 일반 도구

그럼 어떻게 해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깊은 경험과 이해의 단계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건 예상치 못한 감기처럼 갑자기 닥치는 걸까? 초능력자만이 알 수 있는 으스스하고 무섭기도 한 주문, 일종의 두 번째 축복이라고 불리는 그런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스펙트럼의 다른 끝에서 하나님과의 깊어지는 교제, 그러니까 일종의 어떤 기술을 적용해서 얻어내는 결과일까? 아니, 과연 영적 경험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가? 몇 개의 양초와 적절한 미학적 주문으로 올바른 분위기만 만들어내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걸까?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54는 이렇게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방편은 무엇인가?” 대교리문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고 나서 이제 우리의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은 혜택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누리는가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데 어떻게 그분과 교통하는가? 교리 문답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또는 일반적인 방편은 그의 모든 규례인데, 특별히 말씀과 성례 및 기도이다. 이 모든 것은 택함을 입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유효하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제정하신 모든 의식, 모든 훈련과 관행은 외적이며 또한 일상적인 수단이다. 그런 다음 그로부터 파생된 세 가지 중심이 되는 기본 수단을 나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유익을 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기 전에, 은혜의 수단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누리는 은혜와 함께(corporate) 누리는 은혜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두 개의 분리된 훈련 세트가 아니라 동일한 세 가지 수단인 말씀, 성례, 그리고 기도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기도는 공적으로(그리고 사적으로) 사용도록, 그리고 세례와 성찬식은 함께 사용하도록 정하셨는데, 부지런함과 믿음으로 그 명령을 잘 수행함으로 주님과의 더 깊은 친교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실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체험을 갈망한다면, 삶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 많이 느끼기를 원한다면, 굳이 특별한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 어떤 영적 카타르시스나 또는 흔히들 말하는 두 번째 축복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함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면 된다. 매주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으면 된다. 또한 집에서 성경을 펴서 그 진리를 마셔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위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성찬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형제 자매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우리의 죄를 죽이고,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우리가 참으로 그분 안에 있으며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확신을 심화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모두가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그리스도와 더 연합하여 그분의 크신 이름을 찬양하는 그 영광을, 우리 중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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