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글 나눕니다.
우리 대부분은 감정과 경험의 혼합체이다.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추한 것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덮친다. 핵심은 ‘이러한 감정과 경험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이다.
신자로 산다는 것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특히 걱정과 슬픔에 직면했을 때, 어떤 영향을 끼칠까?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그녀의 책 ‘피난처’(The Hiding Place)에서 첫 번째 철도 여행을 고대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여행이 몇 주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수시로 아버지에게 가서 표를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신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할 거라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행여 표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여행 당일에 표를 못 구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을 통해서 그녀가 배운 교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표를 주시는 날은 여행 당일이지 그 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그 표를 지키신다.
마음의 상처와 실망,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개인적인 실패를 겪는 순례를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이 참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현세에서 영원으로 여행하는 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만 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표를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오늘이라면, 표가 지금 내게 오고 있는 중이다. 오늘이 아니라면, 깨어 있는 상태에서 감정이 우리를 통제하도록, 또 걱정이 우리를 몰아붙이게 놔두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는 독단적이고 비인격적인 세력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에게 고난의 때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1.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31:14–16).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재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되새기게 하는 문장이다.
시편 31편의 첫 구절을 보면 다윗이 괴로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몇 구절이 지나서 그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고통의 상태로 즉각 돌아간다. 이런 식의 고통과 기쁨의 순환은 기독교 순례자에게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실망과 괴로움의 반복은 믿음의 길을 가다 보면 꽤나 흔하게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네가 들고 있는 모든 짐, 두려움, 공황, 근심, 마음의 고통을 다 내게 가지고 오라. 대신 내 멍에를 메어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내가 베푸는 사랑의 통치 아래에서 살도록 하라. 그러면 너의 영혼이 영원히 쉼을 얻을 것이다(마 11:28-30).
이것이 바로 안전의 약속이다. 짧든 길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슬프든 행복하든 우리의 시간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해야 할 선한 일을 주실 것이며, 마지막 날에는 무한한 날과 함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곳으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2.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인정한다
슬픔은 우리를 극도로 압도할 수 있는 감정의 한 예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경험이 많을 것이다. 내 경우 십대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이 내가 느낀 첫 압도적인 슬픔이었다. 그날 이후 그 어떤 것도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와 같을 수는 없었다.
믿음이 슬픔이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 굳이 오랜 신앙생활이 필요하지는 않다. 바울은 친구 에바브로디도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이렇게 썼다. “사실, 그는 병이 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만이 아니라 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너에게 겹치는 근심이 생기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빌 2:27).
에바브로디도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울은 아파했다. 물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상실을 경험하는 것, 또는 상실의 가능성 앞에서는 진정한 슬픔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슬픔은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힘들게 만들고, 그로 인해 어떤 기쁨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슬픔이라는 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언젠가 슬픔이 그보다 훨씬 더 큰 기쁨으로 구속될 바로 그 현실을 말이다. 그리고 슬픔은 다름 아니라 우리 주께서 개인적으로 겪은 현실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3. 예수님은 슬픔과 소망이 공존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셨을 때,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그분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슬픔을 보이셨다.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기 직전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진심으로 슬퍼서 우셨다. 이 장면이 드러내는 신비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성을 가지고 계시기에 사랑하는 친구를 잃으셨을 때 진짜 눈물을 흘리신다는 점이다(요 11:33-35).
성경은 죽음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이룬 승리의 실재를 소개하지만, 결코 화려하고 무정한 승리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알렉 모티어(Alec Motyer)는 이렇게 썼다. “눈물은 신자에게 적합하다. 실제로 눈물을 더 많이 흘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부드러움과 생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기쁨이나 슬픔의 모든 감정을 훨씬 더 민감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겠지만, 결코 상실과 외로움이 주는 괴로움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든 고통이 그칠 그 날을 계속 갈망할 뿐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예수님을 우리의 모범으로 계속해서 바라볼 때, 예수님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생명”(요 11:25)을 동시에 보게 된다. 이런 사실을 바로 알게 될 때, 걱정과 슬픔이 넘치는 삶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소망으로 마음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