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관한 귀한 글 (베네사 리즈너) 나눕니다.
올해 초 팔이 완전히 망가졌다.
옷도 혼자 입을 수 없는 상태여서, 아침 9시도 되기 전에 이미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나는 후소아마비 증후군(현재로서는 원인이 명확치는 않으나, 소아마비를 앓았던 사람이나 다른 유전 요인으로 인하여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인 이후 신경 세포의 이상으로 근육의 약화가 진행되고, 이로 인해 관절염이나 연골 손상 등 여러가지 후유증이 나타난다-역주)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이로 인한 어려움은 어느 때에 어떤 종류의 고통이 닥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이 당장 오늘 하루를 힘들게 할지, 혹은 어느 만큼의 엄청난 고통일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하루 또다시 얼마나 큰 싸움을 버텨내야 할까?
내게 왜 이런 부당한 일이 생겼냐고 주님께 울부짖었다. “이렇게는 못 살아요. 남은 인생을 이렇게는 못 산다고요. 정말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요.” 나는 절망했고 화가 났으며, 또 너무도 힘들었다. 이 외침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정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을 짊어진 채로 남은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잠잠함 속에 찾아온 말씀
그렇게 한참의 울부짖음이 끝나자 나는 잠잠해졌다. 할 말을 다 했고 이제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하나님이 과연 응답하실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듣기 위해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곧 조용함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의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너에게 남은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살라는 게 아니야. 오늘 하루를 살아내라는 거란다.” 나는 이 울림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 즉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상황은 달라진 게 없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오늘이라는 한정된 시간 만큼은 아마도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남은 삶’ 전체보다 훨씬 덜 무서웠다. 단 하루라면, 그것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안도의 홍수가 나를 감싸고 지나간 후, 아까의 그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너에게 남은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살라는 게 아니야. 오늘 하루를 살아내라는 거란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었을까?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말씀인가? 성경이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나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기억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그렇다. 하나님은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고, 나는 그렇게 오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관해서, 아니 내일에 관해서 초조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하루의 근심은 그날 하루로 족하다(마 6:34).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기 때문에(애 3:22-23; 눅 1:37), 주님은 내일 아침은 또다시 새로운 기쁨과 자비를 내게 주실 것이다(시 30:5).
이는 성경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사르밧의 미망인에게 기름과 밀가루는 필요한 만큼 계속 주어졌고(왕상 17:14-16), 이스라엘 군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도 주님의 천사가 185,000 명의 앗수르인을 전멸시키는 기적을 경험했다(왕하 19:35). 또한 기드온은 미디안의 막강한 군대를 고작 300명으로 패배시켰다(사 7:1-25). 사실, 그들 중 아무도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종종 우리에게도 그런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막 9:23).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나를 안심시키셨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믿으면 상황이 바뀔 거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단지 오늘을 견디라고, 그리고 내일을 믿으라고만 말씀하셨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그리고 감사하라
그러나 오늘을, 어떻게 매일의 오늘을 견뎌낼까? 나는 궁금했고 다시금 불안했다. 오늘 하루는 여전히 내 앞에 버티고 있고 거기에는 어려움이 가득했기 때문에, 또다시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충분하다는 사실과 이를 말해주는 성경 구절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그렇다. 그분의 능력은 나의 약함으로 더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그분을 나를 강하게 하시고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사 40:30-31; 빌 4:19).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다(시 34:18). 그 말씀대로, 내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그분은 더 가까이 나를 붙잡으실 것이다(약 4:8).
우리는 오늘 하루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뻐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살전 5:16-18).
고난의 순간마다 하나님께로
고난 중에 기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집중해서 보아야만 한다. 또한 시련은 무겁고 끝이 없지만 영원과 비교하면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내게 안기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후 4:17).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육체적이든, 감정적이든 또는 영적이든, 모든 통증은 나의 정신을 사로잡고는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순간마다 나는 내 자신에게 함몰되어 더 깊은 절망으로 빠질지, 아니면 예수님께 집중함으로써 은혜를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선택한다. 이제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고난은 나로 하여금 숨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순간 순간 나누는 그분과의 대화는 나를 변화시켰다. 그 방법이 아니고는 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충분함과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고후 3:18). 고난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도록 함으로써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보게 하는 주님의 특별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고통을 당하지만 부서지지 않음을 아는 믿음
오늘 하루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생각해보면 솔직히 힘들었다. 하지만 남편이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고, 간신히 운전해서 물리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에는 치료사가 문 앞에서부터 나를 기다리다가 부축해주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공급하시는지를 오늘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종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었고, 집중하기가 힘들었으며, 또 고통은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절망의 순간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다시 오늘의 남은 일상을 사는 것. 나는 이제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중략]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나의 하루가 아무리 힘들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 하루가 나를 무너뜨리게 하지는 않으셨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고통과 위로는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 교대한다.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오늘 하루 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건 감정적인 고통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고통이 더 심한 날이라도, 나는 하나님이 내 남은 인생 전부를 고통 속에서만 살지 않도록 하심을 알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 어떤 날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시기도 하지만(엡 3:20), 또 어떤 날은 내가 그냥 폭풍 속에서 간신히 하루를 버틸 정도로 도우신다.
그렇게 매일매일, 그분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