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로새서 3장 16절)

1.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기를 좋아하였다. 초등학생 시절 때에 어른 예배에 들어가 가끔 특송을 불렀던 기억도 난다. 중고등부 시절 때에는 성가대에서 없어서는 테너였다. 남학생들끼리 모여 중창을 하고 후배들에게 노래까지 가르쳤다. 사실 당시의 교회음악의 현장은 예배가 아니라 성가대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당시에 무슨 CCM 있었던가! 고작 있었던 것이 소위 말하는복음성가였다.
예배시간 때에 부르기에는 조금 눈치 보이고, 그저 친교 시간에 그렇게 열심히 불러댔던 노래들, 바로 복음성가였다. 그렇다. 예배 시간에 불러야 하는 노래가 나름대로 따로 있었다. 찬송가,
혹은 성가대가 부르는 전통적인 찬양의 노래들당시 내가 존중하고 따랐던 이유는 한가지였다. 예배 음악은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기에 그만큼 고상한 음악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2. 틀린 말은 절대로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교회음악을 공부할 때까지 몰랐다. ‘예배음악 역사 배우는 시간에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회개의 눈물이었다. 이유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이 잘못 알았기에, 둘째는, 잘못 가르쳤기에 그렇다. 예배 시간에 부르는 노래는 음악적으로 훌륭한 노래여만 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었고 또한 그렇게 많은 학생들에게, 성가대원들에게 가르쳤다. 심지어 설교시간에까지 그렇게 말씀을 전하였다. 바로 골로새서 3 16절의 말씀을 몰랐기에 외골수적인 찬양관이 나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3. 골로새서
3
16절의 말씀의 한국 번역본이 잘못 되었다. 한국 성경책의 번역에 오류가 있다는 지적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로새서 3 16절의 말씀은 반드시 거론되어야 한다. 찬양에 관한 올바른 리더십을 제공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윤택하게 그리고 너희의 지혜 안에 거하도록 하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안에서 서로에게 가르치며 훈육하면서,
그리고 주님께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노래하며

 

5. 골로새서
3
16절의 말씀의 직역이다. 무엇이 다른가? 많이 다르다. 우선 본문의 말씀은 세가지의 내용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하며, 둘째는 서로 가르치라는 것이며, 셋째는 노래하라는 것이다. 말씀과 교육, 그리고 노래, 바로 세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말씀이다. 중에 교육이 문제인 것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안에서 서로 가르치고 훈육하라무슨 의미인가? 당시의 교회음악의 분류이다. 2000년의 교회의 역사가 지났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현재의 교회음악 수준보다 훨씬 좋았다. 현재의 우리 교회에는 그저찬양…’ 이것이 아닌가? 아무튼 초대교회 때에는시편의 노래‘, ‘찬미‘, 그리고
신령한 노래 있었다. 시편의 노래와 찬미는 예배 시간에 불렀던 노래들이며, 신령한 노래는 성도들이 일상의 삶에서 노래하였던 것을 말한다. 성도들의 부르는 모든 노래는 찬양의 의미를 지니고도 있지만 교육의 기능도 감당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6. 그렇다면 한번 적용해 보자. 세상의 노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음악을 부르고 해야 하는데, 고상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헨델과 바흐를 배워야 하나? 교회의 예배의 역사에서 검증된(?) 음악만을 해야 한다고 찬송가에서 있는 노래를 배워야 하는가? 우리 한국교회는 모르고 있는 같다. 지금 우리의 찬송가가 미국,  영국의 부흥성가, 복음 성가였다는 것을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음악을 통해서도 예수를 선포했으며, 예배음악을 통해서도 회개와 헌신 그리고 결단을 촉구하고 교육하였다. 클래식을 몹시도 싫어하는 청년이 있다면 그에게 클래식 음악을 먼저 가르쳐야 하나?

 

7. 예배 음악을 포함한 모든 교회음악이 세상의 음악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생각을 필자는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예배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의 기능도 있지만 사람에게 감화 감동을 주어 예수를 올바로 선포하는 기능도 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곳으로만 치우치게 된다면, 위험천만한 것이 된다. 지교회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분들의 깊은 기도와 학문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Similar Posts

  • 버릴 것은 버릴 줄 알아야…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한지 처음으로 서재를 옮겼다. 반지하에 있던 나의 골방을 큰 아들의 방으로 물려주고 잠을 자는 방을 서재로 꾸몄다. 12년 동안 나 홀로 썼던 방의 모든 것을 옮겼다. 책들을 포함해서 자질구레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조그마한 방에 그렇게도 많은 것들이 있었나 싶다. 그런데… 보지 않았던 책들, 사용하지 않았던 케이블, 단 한번도 참고조차 하지 않았던…

  • 마음을 다시 잡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 오늘…  여전히 나는 일어나는대로 샤워를 하러 샤워실로 들어갔다.  내가 쓰는 샤워실은 나름 오래되어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았고, 청소할 곳도 있었다.  늘 그렇듯이… 집이 낡았구나, 이 오래된 집에 꽤 오래 사네, 나중에 손도 보고 대청소도 해야지… 하면서 샤워를 했다. 물론 그것은 책임감 없는 불평의 너스레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 찬송의 역사 이야기 4

    찬송의 역사 이야기 (4)               종교의 탄압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미국이라는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 의해 미국의 교회는 시작되었고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단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든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까지 감수해 가며 무사히 미국으로 건너온 그들에게는, 뭐라…

  • 약2:12에서 잠시 주춤하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신앙 안에서 우리는 종종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서둘러 정리해 버린다. 은혜를 말할 때, 자유를 말할 때, 두려움은 곧바로 제거해야 할 감정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어떤 표현들 앞에서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없다. 심판이라는 말이 등장할 때,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 익숙함을 넘어, 다시 주 앞에

    나는 요즘 무엇에 마음을 쏟고 있는가.말씀과 기도, 섬김과 배움의 자리에내 정신과 열망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가,아니면 익숙함 속에 몸만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영혼을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있는가.지쳐 있지는 않은지, 방향이 흐려지지 않았는지,말씀보다 여론과 상식을, 성실한 과정보다 즉각적 결과를더 쉽게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변화는 대개 소란스럽게 오지 않는다.작은 정리, 작은 결심, 작은 복귀에서 시작된다.다시 마음을 모으는…

  • 동네 변호사 조들호

    좋은 드라마는 본다.  정말 좋은 드라마에는 박수갈채까지도 아끼지 않는다.  동네 변호사 조들호… 숨겨진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불의의 모습들…  사람의 생명과 존엄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의 악한 모습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들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세상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까발기며 제대로 활기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다.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조직이 들어서면서부터 교회에도…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