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토요일

 

성도의 정체성에 관한 귀한 글 (엔드류 윌슨) 나눕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피조물 중에 소금만큼 평범한 것도 별로 없다.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우리는 이미 지난 몇 시간 동안 소금과 상호 작용해왔다. 가죽, 도자기, 비누, 세제, 고무, 옷, 종이, 청소용품, 유리, 플라스틱, 의약품을 만드는 데 소금이 사용된다. 소금은 전 세계 수억 개의 카페와 레스토랑 테이블에 놓여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통 옆에 나란히 있는 후추와 달리 소금은 건강에 필수적이며 사람이 정착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항상 필수품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언어에 단맛과 짠맛을 구분하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소금은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이다. 눈이 쏟아지는 날 도로 곳곳에 뿌리는 것도 소금이다. 우리가 만드는 화학 제품의 절반 이상이 특정 단계에서 소금을 포함한다. 소금과 관련해서, 지구 표면의 70퍼센트를 덮고 있는 바다의 수조 톤의 물질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렇게 소금은 어디에나 있다. 

예수님의 비유

모든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소금의 평범함은 예수님의 예화에 좋은 후보가 되게 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상용품 사용을 즐겼으며,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마 5:13)으로 묘사하신 것이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 오늘날까지도 선하고 정직하며 겸손한 사람을 묘사할 때 이 표현을 쓴다. 의외이겠지만, 롤링 스톤즈의 노래, D. H. 로렌스의 시, 그리고 탈취제, 연수기, (당황스럽게도) 와인을 비롯한 흥미로운 다양한 제품의 이름에도 소금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 정말 이상한 점이 있다. 예수님이 정작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른 사람들, 엄청나게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소금이 의미하는 바를 배웠다. 그러니까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더 맛있게 만들고, 또 썩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설명은 종종 서로 충돌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예수님은 음식이 아니라 세상(땅)과 관련해서 소금을 언급했다. 땅에 소금을 뿌리는 건 원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킨 후에 하는 일이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소금을 불과 연결할 뿐 아니라 또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과도 연관시킨다(막 9:49-50). 둘 다 맛이나 보존이라는 개념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기술적으로 볼 때, 염화나트륨은 어떤 경우에도 맛을 잃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고대 세계에서 소금이 갖고 있던 다양한 목적 때문이다. 그 중 적어도 다섯 가지는 제자들을 향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보존하고, 희생하고, 파괴하고, 또한 비옥하게 하는데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혼란스럽다는 가정 하에 예수님이 특히 염두에 두었던 소금의 특정 용도가 뭔지 토론하기보다는, 소금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었던 예수님이었기에 그의 은유가 여러 방식으로 다양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예수님의 제자는 소금과 같다. 우리 또한 소금처럼 평범하고 어디에나 있고 또 우리가 눈치채건 아니건 이 세상 거의 모든 일에 관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에 따라 우리가 해야 할 역할도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소금의 다섯 가지 목적을 살펴보자.

1. 맛내기

소금은 밋밋한 음식(칩이나 감자튀김)에 풍미를 더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풍미(야채)를 강화하거나, 또는 전혀 다른 반대되는 맛을 제공함으로써(절인 카라멜), 음식의 맛을 더 좋게 만든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소금의 용도일 것이다. 맛내기가 다섯 가지 소금의 용도 중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원래 청중들도 이런 사실을 먼저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맛내기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섬기는 방식에 대한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사례이다. 우리는 전세계에 퍼져서 이 세계를 향상시키고, 밋밋한 것에 풍미를 더하고, 좋은 것으로부터는 축복을 이끌어 내고, 또한 구분되고 구별됨으로 대조를 제공한다. 바울이 우리를 향해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골 4:6)라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바로 맛내기이다.

2. 보존하기

소금은 고대 시대 냉장고에 해당했다. 고기나 생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소금을 문질렀고, 그럼으로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 소금이 그토록 귀한 주된 이유였다. 로마 군인들은 때때로 소금으로 급여를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월급(salary)’ 이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즉 세상의 선함을 보존하고, 부패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는데, 이는 우리가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

소금은 단지 맛만 내는 게 아니다. 소금은 보존한다. 

3. 희생하기

희생이라는 측면은 덜 친숙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소금의 두 가지 기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모세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께 희생 번제를 바쳐야 하는지 설명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아마도 음식의 맛을 내고 고기가 상하지 않게 했기 때문에 소금은 모든 이스라엘의 희생 번제에 필요한 부분이었으며 심지어 그들과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기도 했다.

따라서 피터 레이하르트(Peter Leithart)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도 이런 의미에서 소금이다. 이 세상은 제단이다. 인류와 세상은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의 큰 제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순종하고 고통받는 자기 희생으로 스스로를 바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주 희생(cosmic sacrifice)의 조미료가 된다.”

4. 파괴하기

파괴는 훨씬 덜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심판이나 멸망에 소금이 사용된다는 성경 구절이 더 많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또한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오실 날을 묘사할 때 언급하신 이야기이다 (눅 17:3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 그들의 땅이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할 것”(신 29:23)이라고 경고한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했을 때, 세겜 사람들이 그에게 반역했고, 그는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응수했다(삿 9:4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시 107:34)라고 묘사한다. 복음서에서 가장 맹렬한 심판의 구절 중 하나가 예수님의 바로 이 말씀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고대 근동에서 소금은 악에 대한 심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제자들의 목적이 다 같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고 악을 멸하며 정욕이나 탐욕이나 살인이나 불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소금맛 나는 그리스도인을 세상 속으로 흩어지게 하신다.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이고, 또한 바울이 말한 “멸망의 증거”(빌 1:28)의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를 때 우리가 만날 박해를 묘사한 바로 직후에 우리가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종종 교회는 이런 식으로 살지 못한다. 악의 브레이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악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될 것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 

그렇기에 심판에 관한 그분의 말씀은 거의가 다 믿지 않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다. 우리도 소금에 절여져야 한다. 

5. 비옥하게 하기

몇몇 고대 문명에서는 토양을 위한 비료로 소금을 사용했다. 또한 조건에 따라 토양이 수분을 유지하고 밭을 갈기 쉽게 만들고 또한 식물을 위한 미네랄을 방출하고 잡초를 죽이고 질병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고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살았던 환경이 시골이었기에 농경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비료이다. 우리는 조건이 어렵고 삶이 힘든 곳에 있어야 한다. 제자된 우리가 흩어질 때,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잡초를 죽이고,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성장을 촉진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 생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탄생한다. 척박한 땅이 열매를 맺는다.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될 때,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한다”(사 35:1).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미료, 보존제, 희생 제물, 파괴자 또는 비료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의미일까? 한마디로 그렇다. 소금의 역할이 그중에서 오로지 한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말도 꼭 끝까지 들으라. 그러나 오늘 읽은 이 글을 기억하고 감안하면서 듣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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