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주일

 

요한계시록 21장 4-7절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우리의 세상은 죄로 인해 망가졌고, 깨어짐은 우리의 관계와 일, 우리 몸의 기본 조건이다. 그의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구속은 이 부서진 세상에서 우리를 아예 탈출시키는 게 아니다. 그는 이 부서진 세상 속으로 들어와 가난과 고난 속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기에 슬픔의 사람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회복은 이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의 잔인한 육체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육체적 부활에 달려 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이 없는 영생을 위해 지음받았기에 우리 가슴에는 영원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이 잔인한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낯설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그 세상은 언젠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겪는 상실, 슬픔, 배신, 버림받음, 육체적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미리 다 겪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궁극적인 고통을 짊어지셨다고 말한다. 우리의 죄와 그에 따른 형벌인 죽음과 하나님과의 분리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겪은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가 그런 궁극적인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는 수천 번의 내적 시련을 직면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할 때까지 우리는 이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희망 없는 백성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그의 임재를 우리가 느끼도록 하신다. 그리고 나중에 반드시 부활과 새 창조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계속되겠지만, 결코 우리의 끝은 시련이 아니다. 모든 죽음, 모든 악, 모든 눈물, 모든 고통에는 만료일이 있다. 이 덧없는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성숙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이 모든 고통은 우리가 영원한 영광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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