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금요일

 

귀한 글 (마리아 베어) 나눕니다.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맘먹으면서도 내 눈은 다시 거기서 트렌드를 훑는다. 페이스북에서도, 트위터에서도, 인스타그램에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 방역수칙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

코로나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올린 트위트 글이 보인다. 조금 더 스크롤해 내려가니(왜 이걸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마스크를 쓰거나 백신을 맞은 사람은 “두려움에 빠진” 사람이며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글도 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두려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상대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사실 누군가를 비판할 때 나는 그런 문제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철없는 어린아이일수록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한다. 성경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빌 2:3)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에 맞추어서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나 교회나 가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방역 수칙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난 행동들(예를 들어 마스크 착용 여부)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악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우리 태도의 근저에는 ‘상상력의 빈곤’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서 그렇게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우리와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도 잘못된 행동을 하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지 모른다. 또한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가 처한 상황과 동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같은 상황 속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는 아주 악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상상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충분히 떠올려 짐작해 보지 않고 판단한다면 동일한 판단으로 우리 자신이 정죄를 당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이웃사랑의 저 보석과도 같은 대원칙, ‘의심스럽더라도 믿어 주는 자세’(the benefit of the doubt)를 되살릴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1. 모든 사람이 당신과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글에 어떤 키워드를 입력하면 세계의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정보가 나타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여름 MIT와 카네기멜론에서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 둘이서 “아틀라스”라는 새로운 검색엔진을 내놓았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르게 검색되는 구글 검색자료를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었다. 이런 현실은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틀라스 개발자들은 이런 문제를 구글의 “정보 장벽”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방역수칙에 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마스크 착용, 백신 접종, 치료법, 코로나의 기원 등에 대한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혹시 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마다 여러 정보들에 대하여 신뢰하는 정도가 다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는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정보만을 그들에게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책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정보 장벽의 시대, 가짜 뉴스의 시대, 알고리즘의 시대에 서로를 정죄하고 비난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판단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2. 모든 사람이 당신과 동일한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했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는 것일까? 그 사람은 절망에 빠진 사람인가? 아니면 정부를 의지하는 사람인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면역 체계에 이상이 있어서 백신을 맞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백신을 맞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조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을 무릎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안전 대책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마스크 착용이 의무인 곳에 있다가 왔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백신을 맞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의 판단에 대하여 우리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어쩌면 그 사람이 코로나에 이미 걸렸던 사람일 수도 있다. 또는 그가 건강상 여러 이유로 코로나 백신의 위험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람의 의사가 그에게는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가 백신을 맞지 않기로 한 판단에 대한 수많은 정보에 대하여 사실 모두 알지 못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확인하고 평가할 만한 지혜도 없다.) 그렇다면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다!

좋은 소식이 여기 있다: 비록 의심이 들더라도 일단 믿어 준다는 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다. 이처럼 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삼가려는 겸손, 바로 이러한 급진적 행동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자, 그러므로 이제 앞으로 당신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과 마주치거든 한 번 더 그에 관해 상상해 보라. 그리고 다른 형제자매들도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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