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수요일 (시편 98-10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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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다는 강한 변증의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도 됩니다. 한번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인도하셔서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를 위한 가장 큰 언약의 성취의 모습인 것입니다. 

2.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99:9)

누군가를 칭찬하고 인정할 때는 분명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 보다 더욱 나은 것이 있기에 칭찬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와 동일하거나 나에 비해 그리 나은 것이 없다면 굳이 칭찬이라는 말까지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찬양하다’ 혹은 ‘예배하다’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칭찬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우리보다 월등히 나으신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이 세상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건적이며, 제한적이며, 가시적인 그러한 세상적인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만약 그러한 세상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그분에게 있다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2)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기기를 고백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라면, 우리의 예배는 조건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적인, 조건적인, 제한적인 기쁨이요 감사요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주님을 예배하고 섬긴다는 것, 정말 쉬운 것이 아니지요. 우리 생명샘 장로교회… 바로 이것을 훈련하고 교육받으며 서로 나누는, 그러한 주님이 다스리시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4.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101:1)

이 시에서 우리가 베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경배하며 감사를 드릴 때에, 구체적인 제목을 갖고 찬양하길 원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공부하고 그러한 구체적인 주님의 성품이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때에, 바로 그 성품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참으심을 노래합니다. 나에게 비전을 주시는 주님의 부지런하심을 찬양합니다. 나의 못된 말씨를 덮어 주시는 주님의 용서하심을 높여 드립니다… 

5.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102:5)

정말 살이 뼈에 붙은 것 아니겠지요? 아무리 밥을 굶어도 설마… 마음이 아픔으로 인해 오는 절규의 비통함을 강조하는 것 아닐까요? 거짓말처럼 부풀리는 것은 옳지 않겠지만, 마음을 진솔하게 주님 앞에 퍼부어 놓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물질만능의 시대를 맞이하여 그리 절규의 소리를 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여기에 미쳐 있으면 우리는 고민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에 미쳐 있으면 우리의 입에서는 여러가지의 탄식의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사역자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영적 권세입니다. 그래도 살이 뼈에 붙을 정도는 좀^^ 최소한 살이 좀 말랐으면 좋겠는데, 그렇죠? 과연 우리의 탄식 소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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